초록 숲의 향연…"인간 없는 낙원 그렸죠"

입력 2020-05-19 17:53   수정 2020-05-20 13:03


거대한 초록 숲의 향연이다. 키가 큰 야자수, 탐스러운 파파야와 바나나가 열린 나무들, 꽃대가 하늘을 향해 한껏 솟아오른 용설란…. 군락을 이룬 손바닥선인장 사이에서 거북들이 노닐고, 나무 줄기를 타고 오르는 얼룩무늬 초록도마뱀들이 깜찍하다. 새들은 숲속 곳곳에서 노래하고, 원숭이 한 마리가 높다란 나무에서 이 모든 숲의 사정을 내려다본다.

서울 사간동 금호미술관에서 초대전 ‘투워즈(Towards)’를 열고 있는 김보희 화백(68)의 풍경화 ‘더 데이즈(The Days)’다. 3층 전시장의 벽면 두 개를 가득 채운 이 그림은 가로 14.58m, 세로 3.90m의 초(超)대작이다. 100호 크기의 캔버스 27개를 가로로 9개, 세로로 3개 이어 붙인 작품으로, 완성하는 데 3년이 걸렸다.

그림은 왼쪽의 새벽 바다로 시작해서 한낮을 거쳐 오른쪽의 둥근 달이 뜬 밤풍경으로 끝난다. 나무와 풀과 꽃, 날짐승과 들짐승, 파충류까지 숲의 일원으로 참여한다. 서로 다투지 않고 각자 자신의 몫을 다하며 삶을 누리는 숲의 세계는 태초의 낙원을 연상케 한다. 그런데 빠진 게 하나 있다. 사람이다.

“천지창조 5일째의 낙원 풍경이 이렇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신이 천지를 창조할 때 여섯째 날 만든 사람으로 인해 세상이 이토록 어지러워졌잖아요. 그래서 새, 거북, 도마뱀 등과 함께 사람 대신 원숭이를 그려넣었죠. 원숭이가 저라고 생각하고 말이죠.”

그의 풍경에 열대, 아열대 식물이 많이 등장하는 것은 2000년대 중반부터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제주도 풍광에서 영감을 얻은 바가 크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제주의 풍경을 다채로운 색감과 형태로 담아낸 작품 등 55점을 선보이고 있다. 색면추상을 연상케 하는 바다풍경 시리즈, 동식물이 공존하는 원형의 자연을 구현한 ‘투워즈’ 시리즈, 자연에서 발견하는 시간의 순환과 생의 주기를 식물의 씨앗과 숫자로 비유한 작품 등 다양하다. 지난해와 올해 그린 신작 33점을 포함한 미공개작이 36점이다.

2017년 이화여대에서 은퇴한 김 화백은 능소능대(能小能大)하다. 동양화를 전공했지만 그 틀에 갇히지 않았다. 동양과 서양, 구상과 추상의 이분법을 넘어 동양화의 자연관을 서양화 재료로 표현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고 수묵과 채색, 원경과 근경, 풍경·인물·정물 등 다양한 소재를 다뤄왔다. 그의 풍경엔 실재와 상상이 혼재한다.

전시장 1층에 건 ‘더 테라스(The Terrace)’는 서로 다른 시점에서 본 테라스 앞의 풍경을 담고 있다. 100호 크기 캔버스 8개를 합친 대작이다. 원경의 자연은 하나의 시점으로 바라보는 것 같은데 발밑에 있는 듯한 테라스의 시점은 여러 개다. 마치 곡면렌즈로 찍은 사진 같다. 이 작품 옆에 걸린 개의 초상화 ‘레오(Leo)’는 밀도 높은 묘사로 대상의 특징을 드러낸다.

색면추상을 연상케 하는 10점의 바다풍경 시리즈도 눈길을 붙든다. 바다는 김 화백의 작품에서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 사이에 등장한 주요 소재다. 육지와 바다,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경계를 화면 중앙에 배치한 게 특징이다. 시간의 흐름에 관한 각별한 관심도 주목할 만하다. 이른 아침 안개 속에 윤곽을 드러낸 야자수의 꽃을 포착한 ‘언타이틀드(Untitled)’, 나무 너머로 보이는 두 계절의 정오가 담긴 ‘오버 더 트리(Over the Trees)’ 시리즈, 제주 중문 거리의 석양 풍경을 담은 ‘중문(Jungmoon)’ 등이 그런 작품들이다. 꽃을 피우기 위해, 열매를 맺기 위해 분투하는 식물의 강인한 생명력을 표현하고자 다양한 씨앗을 확대해 그린 작품들도 눈에 띈다.

“풍경화에만 나를 가두고 싶지는 않았어요. 수묵이든 정물이든 그때그때 나를 표현하는 겁니다. 숫자가 들어간 추상 작품은 시간의 흐름에 대한 저 나름의 느낌과 인식을 담고 있는 것이고요. (전에 많이 그렸던) 인물도 다시 해보고 싶습니다. 인물은 그 자체로 큰 피조물이니까요.” 전시는 7월 12일까지.

서화동 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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